[맥락과 표현] (6) 딱딱한 표현과 말랑한 표현

신호등의 빨강은 정지하라는 말이니 해석이 필요없다. 표현이 객관적이고 딱딱하다. 교회 십자가 첨탑의 빨강은 여러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표현이 주관적이고 말랑말랑하다. 해석이 필요없는 표현은 딱딱하고, 쉽든 어렵든 해석이 필요한 표현은 말랑하다.

자동차 뒤 유리에 붙은 문구인 “초보 운전”은 아주 딱딱한 표현인 ‘방어 운전 요망’을 약간 부드럽게 고친 것이지만 여전히 단단하다. “저도 제가 무서워요”는 말랑한 표현에 가깝다. “답답하면 먼저 가세요”는 그 둘을 무르게 절충한 표현 같다.

“아기가 타고 있어요”는 말랑한 표현의 일종이다. 아기가 타고 있으니 안전하게 천천히 가겠다는 말도 되고, 재촉하지 말고 알아서 추월해 가라는 말도 되는데, 정작 이 문구가 생긴 유래를 보면 그게 아니다. 이 문구를 원래 목적에 맞게 딱딱하게 고치면 ‘비상시 유아 우선 구조’가 된다. “까칠한 아기가 타고 있어요”라든지 “소중한 내새끼 타고 있다” 따위 문구는 딱딱한 기능에도 적합치 않고 말랑말랑한 기능에도 적합치 않아서 뒤 운전자에게 불쾌함만 준다. 학원 봉고 뒤에 붙은 “미래의 노벨상 수상자가 타고 있어요”라는 문구는 말랑하게 창작한 유치뽕 광고 같다.

딱딱한 표현이 알맞을 때가 있고 말랑한 표현이 나을 때가 있다. 학술 논문이라든지 전문 영역에서는 딱딱한 표현이 자주 오간다. 고유 명칭이나 개념어를 번역 없이 표기하거나 직역으로 두는 게 더 나을 때가 많다. “Ding an sich”나 “물 자체”라고 써야 이해하기 좋고,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부합하게 행위하라”라고 써야 닫힌 영역 안에서 의사소통하기에 좋다. 그렇지만 열린 교양 영역에서는 말랑한 표현이 더 나을 때도 있다. “파악하기 힘든 사물의 진짜 모습”이라든지 “세상 모든 사람이 네가 하는 짓을 똑같이 한다고 생각해 봐”처럼 말랑하게 표현하면 원래 뜻이 조금 훼손되지만 이해 과정에 쉽게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쉽게 써도 충분한데 쓸데없이 어렵게 표현하는 건 딱딱한 표현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다. 우리는 이 상태를 말랑하게 표현하여 ‘중2병’이라고 부른다. ‘외롭다’고 딱딱하게 표현하면 되는데 중2병에 걸린 애어른은 ‘문득 존재의 심연으로 고독이 침잠해 온다’라고 쓴다.

딱딱하게 ‘노인’이라고 써야 할 공문서에 말랑하게 표현한답시고 ‘어르신’이라고 잘못 쓰면 안 된다. ‘어르신 건강 검진’이라고 쓰면 그 잘못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어르신 범죄 급증’에 이르면 그 잘못이 두드러져 보인다. 딱딱하게 ‘장애인’이라고 써야 할 자리에 말랑하게 쓴답시고 ‘장애우’라고 쓰면 안 된다. ‘내가 장애우가 되고 나서’ 같은 표현은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Michael Dales
사진 출처: Michael Dales

딱딱한 표현은 객관적이라 시류를 덜 타지만 말랑한 표현은 유행을 많이 탄다. 아이폰 설정 메뉴 중에 ‘에어플레인 모드’는 말랑한 표현으로, 인터넷 연결과 통화를 차단하는 걸 가리킨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 통화나 인터넷 연결을 금지하던 일이 벌써 옛일이 됐기에 표현으로서 생명력을 잃어 버렸다. 다른 예로 휴대 전화의 ‘진동 모드’는 객관적이고 딱딱한 표현이기에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컴퓨터에 쓰이는 아이콘 중에서 동그랗게 원을 그리는 화살표 모양은 ‘새로고침’이라는 뜻을 전달하는 딱딱한 기호라서 보편적이다. 시류와 상관없이 개념을 새로 창안했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5.25인치 또는 3.5인치 디스켓 모양을 본따서 만든 ‘저장’ 표시는 그 아이콘을 만들 당시의 저장 매체 모양을 반영한 말랑한 기호라서 보편성이 퇴색했다.

문구를 만들 때나 표현을 창안할 때 딱딱한 게 적절할지 말랑한 게 적절할지 한번쯤 생각해 보자. 딱딱한 걸 먼저 궁리하여 만들고, 필요하다면 그 다음에 말랑말랑하게 다듬을지 말지 판단하는 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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