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과 표현] (4) 형식은 내용의 미리보기다

글쓰기란 좋은 형식에 좋은 내용을 담으려는 시도다. 표현 형식에는 글쓴이의 관점이나 태도가 드러나기 마련이라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어떤 단어를 택하여 어떤 방식으로 전개하는지 보면, 글의 내용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한 트위터 사용자가 국립국어원 트위터로 질문을 보냈다.

“하마트면이 맞아여? 하마터면이 맞아여?”

내가 국어원 트위터 담당자라면 무척 짜증날 것 같다. 맞춤법에 관해 물으며 ‘맞아여’라고 적은 꼬락서니도 마뜩잖지만 사전 찾아보면 30초도 안 걸릴 일을 국어원에 묻는 것도 한심하다. 표현 형식에는 내용이 스며든다.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이 보는 한국어 뉴스에서 ‘팩스’나 ‘패션’을 말하며 ‘ㅍ’ 발음 대신 ‘f’ 발음에 가깝게 발음하는 아나운서들이 있다. 발화 형식에 ‘나는 아직 아마추어요’라는 고백이 들어 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는 교육 전문가들 중에 ‘학생들’이라고 써야 할 자리에 ‘애들’이라고 쓰는 사람들이 꽤 많다. 나는 ‘학생’이라는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표현을 쓰는 사람의 말을 더 귀 기울여 듣는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도 좋을 확률이 높다.

단순히 결혼 여부가 궁금하여 물어본 말에 ‘예/아니오’로 답하지 않고 ‘그럼요’나 ‘아직이요’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나쁜 사람들은 아니지만 글을 훌륭하게 쓸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기본 형식을 건너뛰고 주관적 가치 판단부터 부여하는 글은 대개 둘 중 하나다. 위험하거나 유치하거나. 표현 형식에는 편견과 선입관도 은연중에 드러난다. ‘지방에 출장 내려갔다 왔다’고 쓰거나 ‘서울에 올라왔다’고 쓰는 건 적절한 표현법이 아니다. ‘부산에 출장 다녀왔다’고 쓰는 게 맞고 ‘서울로 돌아왔다’고 적는 게 좋다. 부산이 지방이듯 서울도 지방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서울시장도 지방 선거에서 뽑고, 서울에도 지방 법원이 있는 거다. 더 보편적인 형식에 내용을 담고자 하는 이는 ‘명동에서’라고 쓰기보다 ‘서울 명동에서’라고 쓴다.

프랑스 배우 오드리 토투가 출연한 영화 중에 아래 두 편을 비교해 보자.

  • 〈아멜리에〉: 장피에르 죄네(연출), 2001년 해외 개봉.
  • 〈아멜리에2〉: 로랑 피로드(연출), 2000년 해외 개봉.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속편이 전작보다 먼저 개봉했다. 국내에 <아멜리에>보다 늦게 소개된 <아멜리에2>는 <아멜리에>와 상관없이 아예 다른 영화인데, <아멜리에>로 인기를 얻은 오드리 토투가 출연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 배급사가 제목을 그렇게 어거지로 붙였다. 배급사의 행태에 절망하고 분노했을 영상 번역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제목(형식)에 ‘우리 영화사는 장삿속에 눈멀었소'(내용)라고 새겨져 있는 듯하다.

2013년 7월 29일에 몬산토와 서울대학교가 장학금 협약을 체결했다. 이날 몬산토는 농생명대학에 장학금 1억6천만 원 가량을 전달했다. 몬산토는 한국 종자 산업의 씨를 말린 장본인으로서, 전 세계 농민들의 고혈을 짜내어 수익을 창출하는 다국적 농업 회사다. 몬산토 대표자와 협약식 기념 판때기를 같이 들고 환하게 웃는 서울대학교 대표자의 모습(형식)에서 민영화 이후에 펼쳐질 서울대학교의 사업 방향(내용)이 언뜻 비친다.

커피메뉴판

위 메뉴판은 한 카페에서 찍은 건데, 에스프레소 하나로 모든 커피의 특징을 조리있게 설명하는 점이 무척 흥미롭고 깔금했다. 커피 문외한인 내가 커피 종류에 관해 대강 개념(내용)을 파악한 건 메뉴판의 일관한 표현 구조(형식) 덕분이다.

아래는 디자이너 반 시게루가 디자인한 화장지인데 특별할 것이 없다.

하라 켄야, 《디자인의 디자인》, 안그라픽스, 2007.
출처: 하라 켄야, 《디자인의 디자인》, 안그라픽스, 2007.

보통 화장지의 둥근 심 대신 새로 사각 심을 박았을 뿐이지만, 사각 심이라는 형식에 ‘자원을 절약하자’는 권유 내용이 담겨 있다. 둥근 심 화장지는 술술 풀리지만 사각 심에 화장지를 말면 덜거덕덜거덕, 잘 안 풀린다. 화장실 사용자에게 일부러 불편을 준다. 당신이 아주 조금만 불편하면 환경은 조금씩 개선될 것이니 우리 함께 불편해지자고 제안한다. 좋은 형식은 좋은 내용의 벗이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의 성정을 짐작할 수 있듯, 형식과 내용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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