πάθει μάθος — ‘좋음’, ‘음미’, ‘겪음’

아이스퀼로스(Aischylos)
아이스퀼로스(Aischylos)

‘πάθει μάθος’(pathei mathos, 파테이 마토스)라는 희랍의 격언이 있다. pathei가 ‘겪다’, mathos가 ‘배운다’는 뜻이니 묶어서 ‘겪음과 배움’이고, 흔히 ‘고난을 겪음으로써 지혜에 이른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 말은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아가멤논》에 처음 등장한다.

그분께서는 인간들을 지혜로 이끄시되
고뇌를 통하여 지혜를 얻게 하셨으니,
그분께서 세우신 이 법칙 언제나 유효하도다.
(176-178)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는 조금 변형된 형태로 나온다.

오만한 자들의 큰 소리는,
그 벌로 큰 타격들을 받게 되어,
늙어서 지혜를 가르쳐준다네.
(1351-1353)

별로 어려운 말은 아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다. 겪어봐야 안다는거다. 책만 읽어서는 세상사 모른다. 뭘 좀 겪어봐야 물정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참 맞는 말인 듯하지만 어떻게 보면 말짱 어이없는 말이기도 하다.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은 이렇게 저렇게 자질구레한 나쁜 짓들부터 해보면서 일정한 경지에 이르고 그러다보면 벌받지 않고도 나쁜 짓을 할 수 있는, 간단히 말해서 ‘나쁜 짓의 탁월함(또는 지혜로운 나쁜 짓)’이라는 차원에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그런 사람들을 제법 보았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잘 나가는 꼬락서니도 꽤나 보았다. 아무 것도 겪지 못한 채 책상물림 짓만 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무작정 겪어본다고해서 다 올바른 것은 아니다. 뭐가 문제일까? 뭔가를 겪고자 할 때에도 막연하게라도 미리 설정된 좋은 목적이 있어야 그 겪음이 의미있는 것이다. 여기서 ‘겪음’과 ‘좋음’은 서로 맞물리는 관계에 있다. 좋음을 상정하지 않고 무작정 겪는 것은 나쁜 지혜에 이르게 하고, 겪음을 전제하지 않은 좋음은 무기력한 앎만을 남겨줄 뿐이다.

《존 F. 케네디의 13일 - 쿠바 미사일 위기, 거짓말, 그리고 녹음테이프》

전에 읽은 책 하나가 생각난다. 셀던 스턴이 쓴 《존 F. 케네디의 13일 - 쿠바 미사일 위기, 거짓말, 그리고 녹음테이프》이다. 이 책은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에 관한 역사책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존 F. 케네디에 관하여 흥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 수 있다. 그는 미·소 대립이 첨예했던 냉전 시기의 지도자였고 그에따라 여러 차례 전쟁 위기를 겪었지만 그가 가진 기본적인 자질은 전쟁을 불사하는 태도와는 거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가 케네디의 리더십에 관하여 서술하는 부분을 한번 보자.

나는 케네디와 케네디의 재임 시절에 대한 지금의 일부 평가가 불만스럽다. 지금보다 덜 복잡했던 시절에 잘 드러나지 않거나 무시되었던 케네디의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단점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케네디 리더십의 근저에는 어려운 세상을 안정시키려는 지속적이고 진지한 노력이 있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 일단 대통령직에 오르면 잘잘못을 알려 주고 진정으로 심경의 변화를 가져올 재교육을 받거나 깊은 자기 성찰을 할 시간이 없다. 사건이 너무 빨리 벌어진다. 어떤 주제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거나 믿을 만한 전문가들을 찾을 수 있지만, 혼자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대부분의 경우 교육, 타고난 지성, 경험이 뒤섞인 직관에 의지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구절은 “교육, 타고난 지성, 경험이 뒤섞인 직관”이다. 교육 — 이것은 좋음을 향한 숙련이다. 특정한 기예를 몸에 붙게 하는 학습과 다르다. 이것이 출발점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힘이 지성이다. 사실 지성은 타고나지 않는다. 그것은 습득되는 것이다. 지성의 습득은 지성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다. 가끔은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돌이켜 생각해볼 줄 아는 반성적 사유의 힘도 여기에 속한다. 경험이 뒤섞인 직관 — 이것이 파테이 마토스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공식화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을 상세히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수 없다. 역사는 집단이 겪은 이러한 경험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니 역사에서 우리는 참, 거짓을 알아낼 수가 없다. 사악한 자가 승리한 기록도 있는 그대로 적혀 있는게 역사아닌가.

《극단의 시대에 대한 증언: 회상》

나는 요즘 로버트 리프톤(Robert Lifton)의 《극단의 시대에 대한 증언: 회상》(Witness to an Extreme Century: A Memoir)이라는 책을 뒤적이고 있다. ‘극단의 시대’ — 20세기를 다룬 역사가 에릭 홉스봄의 저작 제목이 떠오른다. 여기에 Nazi doctors(나치에 부역한 의사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동물행동학으로 유명한 노벨상 수상자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도 그들 중의 한 명이었다고 한다.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페이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life unworthy of life” — 살려둘 가치가 없는 생명. 그들은 유대인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자들이기에 이처럼 오만한 말을 했을까 싶다.

나치의 살인집행자들은 아침이면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하고 퇴근하면 가족들과 정겨운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이었다. 의사인 아버지가 아우슈비츠에서 그런 일을 하였던 까닭에 교수형을 받았으나 어머니에게 진실을 듣지 못한채 자랐던 여자 이야기가 있다. 그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 로버트 리프톤에게 묻는다: “Can a good man do bad things?” — 착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할 수 있는가? 그 딸에게만은 아버지는 착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착함은 자기 가족에게 국한된 것이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어느 지점에서 그들은 ‘좋음’을 잃어버린 것일까. 어느 순간부터 살인자의 과업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악한 자가 된 것일까. ‘좋음’만으로도 ‘겪음’만으로도 해명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은 이래서 수수께끼다. 인간은 이렇게 철저하게 분열된 자아 — 착한 아버지이면서 사악한 살인집행자 — 를 가지고도 태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누군가의 말처럼 차라리 그들이 날 때부터 괴물이었다면 읽는 우리의 마음은 편할지도 모른다.

“살려둘 가치가 없는 생명”에 대조되어 소크라테스가 《변론》에서 했던 말,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 for a human being. 음미되지 않은 삶은 인간에게 살만한 삶이 아니다”(38a)가 떠오른다. ‘좋음’과 ‘음미’와 ‘겪음’ — 이 셋을 모두 가질 수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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