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과 표현] (1) 사실로 쌓아올린 ‘뻥’

‘쿠야시이'(悔しい)는 일본 운동 선수들이 경기에서 제 기량을 펼치지 못해 아쉬울 때 자주 쓰는 표현이다. 일본어 사전에는 ‘분하다’가 1번 뜻으로 나오지만, 운동 선수들이 저 말을 쓰는 건 경쟁자에게 져서 분하고 억울하다는 걸 표출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을 냉정하게 돌이켜 보거나 스스로 다독이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사다 마오는 쿠야시이 때문에 요즘 한국어 맥락에서 오해를 가장 많이 받는 선수일 것이다. 마오가 김연아와 경쟁에서 뒤처질 때마다 한국의 스포츠 매체는 어김없이 ‘분하다’를 제목으로 뽑고 잔뜩 찌푸린 마오의 사진을 함께 게재한다. 그리고 승리를 만끽하는 ‘국뽕’들의 풍성한 댓글 향연. 연아와 같이 경기에 나왔는지 아닌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연아와 함께 출전하지도 않은 대회에서 마오가 트리플악셀을 실패하고 인터뷰에서 쿠야시이라고 말했다면 한국 스포츠 매체엔 〈’분하다’ 마오, 연아를 겨냥한 강한 승부욕 드러내〉 같은 기사가 뜬다. 경기가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말했을 뿐인 마오에게는 1번 쿠야시이처럼 ‘빡치는’ 상황인 셈이다.

운 나쁜 아사다 마오는 야구 선수 스즈키 이치로의 바통을 넘겨받은 셈이다. 재능 많고 성실한 이 야구 선수가 한국인들에게 ‘입치료’란 별칭으로 불려야 했던 데는,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 대회 중에 했던 이른바 ’30년 발언’이 한몫 했다. 그런데 ‘한국이 30년간 일본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말한 건 이치로가 아니라 국내 스포츠 기자들이다. 이치로는 특정 국가를 언급하지도 않았고 시건방을 떨지도 않았다. 실제로는 이렇게 말했다. “단순히 이기는 것만이 아니라 굉장한 팀이라고 여기게끔 하고 싶다. 상대로 하여금, 앞으로 30년은 일본을 이길 수 없겠다는 느낌이 들게끔 하고 싶다.”

마오가 쿠야시이라고 말한 것도 사실이고, 이치로가 30년이라는 단어를 쓴 것도 사실이지만, 그 사실들이 엉뚱한 맥락에서 쌓아올려지자 되레 진실을 가리는 장막이 됐다. 이용대 선수가 세계 배드민턴 협회에서 관장하는 도핑 테스트 규정을 세 번이나 어긴 것도 사실이고 선수 자격이 1년간 정지된 것도 사실이지만, 금지 약물을 복용하여 징계를 받은 건 아니었다. 대한 배드민턴 협회가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 전까지 사실을 누더기처럼 이은 거짓말 기사들이 난무했다. 그렇지만 뭐 어떤가, 사실이 밝혀졌으면 된 거지.

3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아이들에게 샌드위치를 싸준 아빠의 일화가 더 감동적이었던 건, 아이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샌드위치 빵에 케첩이나 겨자 소스 같은 양념으로 귀여운 그림을 그려주었다는 점인데, 이 해외토픽 역시 사실을 누더기 조각처럼 이어붙인 뻥이었다. 3년간 샌드위치를 싸 준 건 맞지만 양념으로 그림을 그린 건 아니었고 다만 샌드위치를 넣은 지퍼백 위에 펜으로 그렸을 뿐이다. 이 정도는 귀엽게 봐 줄 만하지 않은가.

교육방송 〈지식채널e〉에서 방영한, “프리다는 울고 싶을 때 우는 대신 울고 싶은 자기 모습을 그렸어요”라는 동료 화가의 말은, 단행본 《지식e》에서 “나는 울고 싶을 때 우는 대신 울고 싶은 내 모습을 그렸다”라는 프리다 칼로 자신의 말로 둔갑했다. 이것도 주제를 더 잘 전달하려고 그렇게 살짝 다듬은 거니까 대승적 차원에서 용서해 주자고.

내가 사는 경기도 파주에서 고향인 충북 제천까지 차로 3시간 정도 걸리는데, 고향집에서 어머니와 점심을 같이 먹으려면 9시쯤에는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밍기적거리다가 10시 반에야 출발하고 나서는, 이천도 못 갔으면서 어머니께 한소리 들을까봐 여주 지나는 중인데 차가 좀 밀려서 늦을지도 모른다고 살짝 뻥을 친다. 어머니는 12시부터 아들을 1시간 반 동안 하염없이 기다린다. 어머니는 관대하니까 그냥 넘어갑시다.

지금 어디냐는 친구의 물음에 현위치를 보고하지 않고 ‘거의 다 왔다’고 눙치는 게 무슨 잘못인가. 왜 그리 늦냐고 탓하려고 전화한 게 아니라 도착 시각을 가늠해 기다리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려고 친구가 물어본 거라 한들. 한남대교가 저 멀리 보여서 지금 한남대교라고 전하는 게 뭐 대수인가, ‘어, 2킬로미터로 추정되는 1시 방향 전방에 한남대교가 보여’라고 말하란 말인가.

괜찮다, 다 괜찮다. 우리 주변에 널리 퍼진 이런 유비쿼터스 관용 정신과,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트위터와 페북에 열심히 퍼나르고 카톡에 뿌려대는 성실한 공유 정신 덕분에 쓰레기 글들은 면벌부를 얻고 독버섯처럼 다시 피어난다. 악의 없는 사소한 거짓말, 더 재미있게 전달하려는 사소한 과장이 그런 의사소통 풍토가 조성되는 좋은 조건을 마련해 준다. 면벌부는 은근슬쩍 면죄부로 교체 발급된다.

사소한 과장이 쌓이면 사실은 허구가 되며, 다큐멘터리는 호러물이 된다. 6천만 원이라고 들은 정보를 1억으로 반올림해버리는 호방한 기질이 말과 글에 배면, 사건이나 사태의 진상은 아랑곳없이 그 사람의 뇌리에는 그저 더 흥미를 끌었던 이야기만 진실처럼 남을 것이다. 예컨대 채선당 사건을 떠올렸을 때 임신부를 걷어찬 종업원의 만행만 남는다. CCTV 기록은 종업원과 임신부 사이에 아무런 신체 접촉이 없었다는 점을 입증했지만 정정 보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독자의 관심도 이미 멀어졌다. 종업원이 임신부를 걷어찼다는 이야기를 열심히 SNS로 퍼날랐는데 이제 와서 바로잡기도 ‘뻘쭘하고’ 그런 거다. 미필적 고의.

사실이라는 교각을 세우고 그 위에 의견이라는 상판을 올리려면 교각이 촘촘해야 한다. 교각의 간격이 벌어질수록 상판이 무너질 위험도 커진다. 취재하고 쓴 기사들이 아니라 까페베네 따위에서 카라멜 마끼야또 홀짝거리며 상상으로 써 재낀 글들은 부실 자재로 쌓은 교각에 가짜 자재로 만든 화려한 상판을 올린 격이다. 우리가 평소에 사적인 영역에서 사소하게 부풀리지 않아야, 공적인 영역에서 악의적으로 과장하고 왜곡하며 사기치는 기사들도 색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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