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완의 시대》

이승욱·김은산(지음), 《애완의 시대》, 문학동네, 2013.

이 책을 다 읽고 서평을 써보려다가 그만 둡니다. 지금 쓰는 것은 서평이 아니라 잊지 않으려는 요약, 메모입니다.

우크라이나에 새로운 시위 방법이 등장했는데,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경찰 스스로의 모습을 보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자신을 돌아보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하는군요. 이 책을 읽으며, 각자의 무장을 한 채 보이지 않는 위협에 잔뜩 긴장해 있는 나, 우리의 모습을 비춰 보는 듯 했습니다. 거울 같은 책입니다.

우크라이나의 거울 시위

애완(愛玩)의 시대란?
물리적 전쟁을 경험한 부모 세대와 IMF로 정신적 내상을 겪은 자식 세대. 이들은 모두 국가와 권력, 혹은 돈과 외적 성공에 길들여져 있으며 안정을 희구한다. 더불어 몸은 자랐지만 마음은 성장하지 못한 애완의 세대이다. 저자들은 권력의 손에 강압적으로 길들여진 ‘애완’의 세대와 부모의 품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또다른 ‘애완’의 세대가 공존하는 우리 세대를 ‘애완의 시대’라 명명한다.

저자들이 프롤로그에서 밝히듯 “이 책의 시작은 지난 대선의 결과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진단하고, 실제 사례를 되짚고, 그것의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내 얘기도 있고, 내 친구의 얘기도 있고, 전해 들었던 얘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이 피해갈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 ‘애완의 자식들’은 현재 우리 주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부모에게서 자랐으나 비슷한 ‘가르침’을 받으며 큰다는 것이 이상한 것인지 몰랐습니다.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네 할 일이나 열심히 해.”
귀에 익숙한 이 가르침이 젊은이들 앞에 놓여있다. 과연 ‘네 할 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스스로 정하거나 선택한 일이 아니라 대개 부모가 부여한 것이다. 사실 그것은 너무나 모호하다. 그러니 부모 맘대로 정해놓은 ‘네 할 일’을 제대로 못 하는 자녀는 항상 부모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공부를 잘한다고 당장 부모로부터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공부나 교육은 허울일 뿐, 부모의 욕망은 다른 곳을 향하기 때문이다. 공부는 잘했는데 취직을 못 하거나, 돈을 제대로 못 번다면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정작 부모는 자녀가 건강하게 균형 잡힌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돈 잘 벌고 안정적인 돈벌이를 하는 유능한 사회인이 되는 데 관심이 있다. … 그들에게 잘산다는 것은 문화도, 배려도, 나눔도 없이 그저 혼자, 내 가족만 잘 먹고 잘사는 ‘앙상한’ 경제적인 풍요를 의미했다. 그러니 그들의 아이들 역시 자신들이 잘살기 전까지는 그 지독한 인정 욕구를 충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은 아이들은 졸업 후 5년 내에 1억 원을 모으겠다는 ‘당찬’ 포부를 품고, 다른 아이들은 그런 아이를 부럽게 쳐다보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육아의 단계부터 대중적으로 인증된 지식과 의견에 따라 아이를 키우려다 보니 정작 중요한 능력은 잃어버리고, ‘비슷한 가르침’을 시작합니다.

육아를 비롯한 돌봄의 능력은 잃어버린 지식과 품성이 되어버린 것 같다. … 다른 생명에 대한 보살핌의 태도를 포함해, 사람에 대한 세심한 관심이나 인생의 단계마다 겪는 깊은 실존적 고민을 누구와 나누고 누구에게 배울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 많은 젊은 여성이 육아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일종의 ‘관계 맺기’의 어려움이다. 아이들의 다양한 몸짓이나 미묘한 표정 변화, 근육의 움직임 등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표현인데도, 이를 세심하게 관찰하기보다 육아 책에 나오는 지식이나 전문가의 의견 따르기를 선호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현재 남성은 여성보다 취약하고 무능력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가족 공동체는 사라지고 경제 공동체 또는 생존 결사체로 남은 핵가족은 정서적 연대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새로 태어난 생명을 돌보는 것이 가족 공동체 전체의 기쁨이고 마을 공동체 모두의 책임이었던 시대에 가장으로서 아버지의 역할은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것으로 족했다. 하지만 이제 생존 공동체로 남은 핵가족 시대에 남자는 아내의 정서적 수용처, 감정적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아내는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원한다. 하지만 남성은 여전히 누군가를 수용하고 공감하는 존재로 키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비단 이 시대에 갑자기 발생한 문제가 아니다. 남아선호와 불평등의 전통이 만들어낸 오랜 고질이다.

십 년 이상 차이가 나는 후배들과 일을 하며 느꼈던 이질감이 있었습니다. 단지 ‘세대 차이’로 치부해 버릴 수 없는 무엇이었는데, 거칠게 얘기해보면, 이익과 손해에 대한 감각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서른 무렵의 젊은 후배 10여 명이 주축이 되는 모임을 몇 달간 함께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그들은 절대로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에게 도무지 관심이 없다는 점이 두드러졌다. … 그들의 태도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효율성’을 기본 원칙으로 삼아 최대한 ‘수동적인’ 포지션에서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매뉴얼’에 입각해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부모들은 아이들을 위해 아이들을 망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가르치고, 얼마나 효과적으로 가르칠 것인가를 따졌을 뿐,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부모는 자신들의 불안 때문에 삶을 살아가는 데 정작 중요한 것을 제공하지 않았다. 스스로 배워가는 힘과 예측 불가능한 배움의 가능성을 배제한 것이다. ‘배움’이 사라진 교육은 가장 수동적인 행위가 되었다. 그렇게 교육이라는 망령된 미명하에 아이들을 하루종일 책상머리에 앉혀놓고 공부만 강요하다보니, 신체와 정신에 자리한 아이들의 에너지와 감각은 사라져갔다. 그렇게 아이들은 삶이라는 실체를 감각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인간의 조화로운 성장을 위해 중요한 것은 몸으로 경험하는 것, 오감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정해진 답을 맞히거나 아는 것을 반복해서 외우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만의 문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기를 써보는 경험이다. 이런 경험의 결핍이 결국 ‘시뮬레이션’으로 모든 것을 검수하는 세대를 양산했다. … 그래서 그들은 공교육, 사교육에 예술과 취미를 위한 온갖 교육까지 받고 어학 실력과 자격증을 갖췄지만, 정작 삶을 살아가는 데는 요령부득인 헛똑똑이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은 어디서, 어떻게 배울 수 있는 걸까요? 이후 2, 3, 4부에도 그런 내용까지 모두 있지는 않습니다. 방향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이 저자의 주장과도 부합하는 것이겠죠.

한국인들이 서로의 발목과 목줄을 잡고 뒤엉켜 있는 지옥도를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 이 책입니다. 과연 한국에 희망이 있긴 한걸까라는 절망적인 의문을 갖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아이들, 이웃들과 계속 살아가려면 이 애완의 시대를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며 스스로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어른’으로 키우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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